[어떤별] 정우성, 특허법인 임앤정 대표

관리자,  2023년 5월 5일,  조회 1088,   추천 44



어떤 변리사가 될 것인가? 08
정우성, 특허법인 임앤정 대표

약력
96 고려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02 제39회 변리사 시험 합격
04부터 개업 변리사, 특허법인 임앤정 공동대표

저술 활동
11 책 "특허전쟁 : 기업을 흥하게 만드는 성공적인 특허 경영 전략"
12 책 "세상을 뒤흔든 특허전쟁 승자는 누구인가"
12 카이스트 제2회 정문술과학저널리즘상 수상
13 책 "나는 아빠다 : 보통 아빠가 쓴 특별한 육아 이야기"
15 책 "목돈사회 : 대한민국은 어떻게 헬조선이 되었는가"
17 책 "특허실무지식 1: 특허 문서론"
17 책 "특허실무지식 2: 논증과 설득"
18 출판사 이소노미아 편집장
22 책 "생각과 표현을 보호하는 지식재산레슨"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39기 변리사다. 2002년 월드컵이 있던 해에 합격했다. 지금은 특허법인 임앤정을 운영하고 있다. 변리사로 20년 정도 일했다.

어쩌다 변리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 있는 동안 IMF가 터졌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니까, 당장 할 일이 없더라. 취직해서 바로 사회인이 될 마음의 준비를 못 했다. 당장 현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우선 학원 강사로 일했다. 그런데 남들 출근할 때 나도 출근하고, 남들 퇴근할 때 나도 퇴근하는 그런 보통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반년 정도 일하다가 다른 직업을 찾아보게 됐다.

당시에 종로 2가에 종로서적이라는 큰 서점이 있었다. 거기서 자격증이나 따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구경하다가 사법시험을 알게 됐다. 그런데 나는 당시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 상태였다. 사법시험 합격 수기를 읽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할 정도가 아닌 것 같더라. 그때 사법시험 옆에 있는 변리사 시험도 알게 됐다. 변리사 합격 수기를 보니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변리사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당시에 변리사가 뭔지도 몰랐다. 어떤 큰 동기나 의지는 없었던 것 같다. 2000년에 공부를 시작했다.

수험생활은 어땠나요?
수험생활은 너무 즐거웠다. 열심히 공부했다. 인생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했던 시기다. 일주일에 하루는 쉬고, 나머지는 다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했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공부했다. 1차 시험에 붙고, 2차 치기 전에 정말 열심히 했다. 그때 시집도 수 백 권 읽었다. 슬럼프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했다. 모든 것을 외우자고 하면 공부 시간이 부족했지만, 암기를 포기하고 보면 공부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내게 맞는 공부를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폭넓고 광범위하게 공부했다. 다수파보다는 소수파 이론을 좋아했다. 다수파나 통설 견해를 쓰기보다는 소수 견해를 주장하고자 했다. 소수 견해가 있다는 것은, 다수 견해의 논리적 허점을 찾았다는 것 아니겠나. 그런 걸 경청하면서 수험생활을 했다. 예상 가능한 문제에서는 고득점을 받지 못하겠지만, 예상 가능하지 못한 문제 때문에 과락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

처음 2차 시험을 3일 동안 봤던 것 같다. 시험을 치고 나니 합격한 것 같았다. 그래서 슈퍼에 들러서 라면 박스를 샀고, 거기에 수험서를 모두 넣어서 정리했다. 그리고 지금 내 인생에서 부족한 게 뭘까? 생각하다가… 견문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땐 신용카드 발급이 잘 되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나도 나고 미래의 나도 난데, 지금까지는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위해 희생했으니, 이번에는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희생해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2개월 할부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다.

그해 12월에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합격자 명단을 봤는데,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2차 준비를 시작했다. 전기공학과라서 회로이론 등을 할 거라고 예상하겠지만, 12월에 2차 시험을 준비해서, 고득점을 받는 것보다는 안정을 추구했고, 법 과목인 행정법을 선택했다. 과락이 나올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처음으로 공부했던 낯선 학문이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인생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특허청 등 국가기관을 상대로 하는 일에서 국가의 행정 행위를 잘 이해하고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여름쯤 되니까 또 합격할 것 같더라. 그리고 시험을 봤다. 수석인 것 같았다. 시험을 치자마자 동남아시아 3개월 배낭여행을 갔다. 다행히 그때는 진짜 합격했다. 수석은 아니었고 간신히 합격했다.

변리사 수험 생활 동안 정신적으로 유복했다. 내 인생에 중요한 키워드는 반성, 성찰, 성장이다. 누구나 20대에는 부끄러운 일이 많지 않나. 나도 그랬다. 공부하는 그 긴 시간 동안 20대의 지난 일들을 반성하고 성찰했다. 지나간 대학생활 시절부터, 여러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가졌던 신념들. 앉아서 공부하면서 생기는 수많은 잡념을 통해 과거를 정리하고 지나온 20대의 삶을 돌이켜 보면 정리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같았다. 그런 시기 없이 바로 사회생활을 했다면, 젊은 나를 성찰할 기회가 없었을 것 같다. 아주 좋은 수험생활이었다.

변리사 생활을 시작하시는 건 어떠셨나요?
나는 큰 사무소에서 수습을 하지 못했다. 당시에 특허청에서 심판관까지 맡으셨던 김중효 변리사님이 독립해서 개업을 하셨다. 나는 그 사무소에서 수습을 했다. 반 년 정도 일했다. 그러다 특허법인 원전으로 이동했다. 여기서도 반 년 정도 일했다. 두 사무소에서 모두 사수 없이 일했다. 일이 주어지면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어떤 수습처에서 일을 배우는 지가 중요하다는 말, 김앤장 같은 커다란 회사에서 수습을 하면 멋지다는 말들이 있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사수가 없다 보니, 내 관점으로 미친 듯이 일하고 야근하고,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때 경청이 습관이 됐다. 친구들을 만날 때 그들의 실무 얘기를 엿들었다. 판례를 볼 때도 판결의 요지보다는 판결문에 있는 사실관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일을 배웠다. 포대를 떼서 다른 변리사가 하는 일들을 모범 삼아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수습 시절을 보냈다.

수습이 끝나고 바로 개업을 하셨습니다. 흔치 않은 일인데 왜 바로 개업을 하셨나요?
당시에,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내 인생에서 '자유'라는 가치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배우자가 외국인이다 보니, 더욱더 남 눈치를 안 보고 경계를 넘나들며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돈보다는 자유롭게 내 의지로 인생을 살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서 개업을 했다. 고객이 없어서 한 달 매출이 20만 원이었다. 좌충우돌을 많이 했다. 그게 현재 특허법인 임앤정의 모체이다. 개업한 명칭은 비밀이다. 부끄러워서. 그러다 최은실 변리사님이 같이 하자고 해서, 최정 국제특허법률사무소가 되었다가, 임승섭 변리사님과 2012년에 임앤정 특허법인이 됐고, 이제 10년이 지났다.

특허법인 임앤정을 운영하는 건 어떠신가요?
운영보다는, 그냥 '특허법인 임앤정'이라는 이름을 걸고 일하는 실무 변리사의 마음이 지배적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보통의 변리사의 삶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처음엔 남들처럼 '특허변리사'로서 '특허 일'을 하면서 개업을 했지만, 지금은 변리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다양한 일'을 한다. 다른 특허법인에서 근무하거나, 인하우스에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무소 규모를 키운다거나, 영업을 많이 한다거나, 그런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은 그저 컴퓨터 앞, 고객으로부터 받은 일을 잘하는 일, 그곳이 내게는 현장이며 나의 세계이다.

지금까지 사무소를 운영하다 보니 규모가 작아지기도 하고, 커지기도 했다. 지금도 큰 사무소는 아니다. 운영자의 관점에서는 나는 능력자가 아니다. 경쟁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쪽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지도 않다. 다른 면에서 내 인생과 내 사무소를 바라본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유로운 인생이 중요하고, 그런 스타일로, 그런 정신으로 살펴본다. 내 자유와 내 정신과 내 스타일이 중요하다면, 남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다른 구성원들의 인격과 능력을 수치로 계량화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임앤정에 대해서 말하자면, 임앤정 구성원들은 모두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사무소의 장점이다. 우리 사무소의 누구도, 돈으로 자신과 타인을 측량하지 않는다. 의뢰인도 돈으로 측량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와 의뢰인 사이의 신뢰도가 높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 허튼소리는 아닌 것 같다. 의뢰인도 우리를 닮는다. 대체로 의뢰인들이 젠틀해서 일하기 좋은 환경이다. 

변리사들은 이런 얘기를 한다. 나는 연봉이 1억인데, 회사에는 3억 원어치, 5억 원어치 일을 했다고. 연봉이 얼마니까 얼 만큼 일해야 하고, 고객은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하고… 변리사 사회에서는 이렇게 자신을 수치로 측량하고, 또 타인을 수치로 측량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식의 사고방식이 습관화되곤 하는데,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바깥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수백억 원을 벌기도 한다. 스스로를 수치에 의해서 마치 기계적인 부품처럼 도구화하기보다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고, 어떻게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들며, 자기가 하는 일을 더 넓고 더 깊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좋지 않을까? 뭐, 물론, 나의 이런 나이브한 입장 때문에, 우리 임앤정이 큰 사무소가 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변리사가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남을 돕는 직업이다. 관계와 실무, 두 가지 측면에서 변리사를 정의할 수 있다.

먼저 관계적인 측면이다. 변리사는 의뢰인을 빛내는 일을 하는 특수한 직종의 사람이다. 의뢰인의 비즈니스를 돕는 사람들은 많다. 돈으로 돕는 사람도 있고, 마케팅으로 돕기도 하고, 디자인으로 돕기도 하고. 우리는 지식재산의 측면에서 의뢰인의 비즈니스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하루하루 남을 위해 일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변리사 직업이라는 것은 스스로 빛나는 일도 아니고, 빛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의뢰인을 돕는 게 이 일의 본질이므로, 굳이 빛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변리사가 너무 활약하게 되는 상황이 오면, 사실 기업이 위기인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러므로 위기를 보편화해서 우리를 내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들 어렵게 시험에 합격하고, 포텐셜이 높은 사람들이기는 하나, 직업적으로는 우리를 너무 과하게 평가하는 건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다. 전문가의 삶은 시끄러운 게 아니라 평화롭고 조용한 것이다. 그게 고객한테도 이롭고, 우리에게도 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리사 업무가 고귀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돕는 일이니까.

실무적인 측면에서 보면, 남의 생각을 어떻게 잘 표현하는지 고민하는 사람으로 변리사라는 직종을 정의할 수 있다. 전략적으로 표현하든, 법적으로 표현하든, 수사적으로 표현하든. 변리사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사실 나도 공돌이라서, 처음 변리사 일을 시작할 때는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근데 매일 고심하며 글을 쓰면서 10년이 지나다 보니 어느 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 의뢰인은 삼성전자나 해외 대기업 같은 큰 회사가 아니다. 어찌 보면 다행이다. 그런 큰 기업들의 안건을 다루다 보면 필력이 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미 틀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고객은 주로 스타트업이나 작은 회사들이다. 큰 회사라 해도 완성된 조직은 아니다. 의뢰인들이 가져온 1장, 2장짜리 아이디어, 상담을 통해 전해 듣는 완성되지 않은 말의 단편들, 그런 것들을 경청하면서, 여기서 왜 오탈자가 생겼을까? 어째서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부분이 있을까? 왜 이 문장에서 이런 조사를 사용했을까? 등등. 미묘한 조사연결의 차이까지 민감하게 탐구하다 보니, 상대방이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에 더 근접하게 되고, 또 필력도 늘고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표현되지 않은 타인 생각의 핵심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어떻게 표현해야 아이디어를 더 빛낼 수 있을지 알게 된 것 같다. 그런 직업으로 나는 변리사 일을 이해한다. 

나는 영업을 잘 하지 않는다. 이제 이만큼 나이가 들어서는, 영업을 못한다, 재주가 없다, 무능력하다, 라고 검증된 것 같다. 그 대신, 나는 일을 아주 잘한다고 칭찬받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칭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는 꼭 '변리사로서', '한 사람의 전문가로서' 칭찬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욕망 때문에, 특허문서를 더 쉽게, 의뢰인이 더 이해하기 쉽게, 그러면서도 실무적으로도 맞는 그런 식으로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랬더니, 이전까지 다른 변리사에게 의뢰했을 때는 특허문서를 읽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는데, 내가 쓴 문서를 보고 이해가 됐다면서, 칭찬을 해줬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고 퇴적시키면서, 공돌이가 글쟁이가 됐던 것 같다. 이런 것이 우리 변리사 일의 풍섬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내 영혼도 풍성해지게 된 것 같다. 지금은 이제, 특허문서든, 보고서든, 감정서든, 무엇이든, 딱히 양식이 필요가 없게 됐다. 그냥 새문서로 쓴다. 어느덧 걸어 다니는 양식이 됐다. 나는 이런 사소한 게 마음에 든다.  

어떤 변리사가 뛰어난 변리사라고 생각하시나요?
경청하는 사람이 뛰어난 변리사다. 분야와 무관하게, 어떤 문제든 간에, 의뢰인의 생각은 경청한다. 그게 핵심이다. 여기서 경청이라 함은, 발명의 내용을 경청하자는 게 아니다. 조금 더 근원적인 부분을 경청했으면 좋겠다. 이 사람은 왜 이 사업을 하려고 하는 건가? 이 회사는 재정상태는 어떤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일까? 이 회사가 생각하는 시장의 경쟁력이나 경쟁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등등, 의뢰인의 비즈니스 자체를 경청하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다.

모든 일은 능동적으로도 할 수 있고, 수동적으로도 할 수 있다. 수동으로만 일하면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능동적으로 일을 하려면 알아야 할 게 많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공부해야 한다. 의뢰인의 문제에 대해서 뭘 알아야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다. 지식이 일천하면, 고객과 아주 좁은 시야로만 대화할 수밖에 없다. 특허 명세서를 위한 사항으로만 기계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너무 멋이 없다. 조금 더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고 적극적으로 제안할 수도 있고, 특허 외에도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도움을 주려면, 역시, 지식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서, 대체로 의뢰인도 나이가 함께 많아진다. 그들과 대화할 때 너무 시야가 좁다면, 의뢰인은 대화가 재미없다고 느끼고, 인생의 깊이가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교양이 필요하다. 의뢰인과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실무적으로도 뛰어나면서, 다양한 분야의 의뢰인과 대화가 가능하면 좋겠다. 견문이 넓어야 한다.

나는 전자 쪽 변리사야, 나는 바이오 변리사야, 나는 상표 변리사야 라면서 스스로를 전문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분야를 정해서 20년 동안 일을 하게 되면, 그 전문분야밖에 모르게 된다. 다른 이야기에 귀를 닫게 된다. 전자 변리사인데 상표와 같은 다른 주제가 나오면, 아 그런 건 수험생 때 공부한 거라 다 까먹었어~ 하고 듣지 않게 된다. 나는 그걸 다 듣는 게 변리사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고객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를 수는 있다. 반도체 기업의 큰 고객이라면, 반도체만 잘하는 변리사를 선호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 분야 대기업의 대리인으로서 일하고 있더라도, 인생 100년이다. 과거의 선배 변리사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계속해서 실무를 할 가능성이 크다. 과연 언제까지 반도체 관련 일만 할 수 있을까. 다른 기회도 있지 않겠는가. 귀를 열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대학교에서 무언가를 전공했다고 하지만, 사실 1학년을 빼고 보면 2~3년 정도 공부한 거다. 인생 길다. 또 새로운 걸 공부하면 된다. 나는 전기공학과를 졸업했지만, 상표 업무도 하고 저작권 업무도 한다. 그리고 잘한다. 업역의 확대를, 감정평가, 소송대리권처럼 외부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도 좋겠지만, 일단 우리가 할 수 있으며, 이 자격증에 관해서 하는 것으로 설계된 업무 영역을 한껏 넓혀서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 실제로 자신의 업역을 극도로 줄여가며 일을 하면서, 업역의 확대를 말하는 것은 좀 이상한 게 아닐까? 하여튼 일단 변리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특허실무지식이라는 특허 명세서 작성을 위한 교과서를 내셨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책을 쓰셨나요?
나는 세 사람의 독자를 위해 책을 썼다. 모두 특허 명세서를 쓰고 싶어도 사수가 없어서 배울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첫 번째로, 상표만 할 줄 아는 변리사 님들을 위해 썼다. 그들도 특허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 변리사 제도가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표 일만 하다가 특허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서 특허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이 책을 보고 특허는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할 수 있는 지침이 되기를 바랐다. 실제로 이 책이 역할을 했다는 말씀도 들었다. 

두 번째로, 특허청 출신의 변리사 님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분들은 심사 실무를 해오셨지만, 변리사로 일하게 되면, 자기가 했던 일과는 정반대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제대로 된 사수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업 위주로 활동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수가를 낮춰서 영업하게 된다. 그들이 이 책을 보고 특허명세서는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할 수 있는 지침이 되기를 바랐다.

세 번째로,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들도 실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변리사와 변호사 사이의 업역 대립에 소극적인 편이다(성정이 싸우는 데 맞지 않다). 난 그들이 우리 일을 좀 했으면 좋겠다. 그들이 명세서를 쓰기 시작하면 업계가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그들이 직접 실무를 해보면서 특허 명세서를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걸 체험한다면, 자연스럽게 수가가 올라갈 수 있다.

책 내용이 독특하다는 평에 관해서는, 새롭게 만든 언어들, 개념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 변리사들이 한국 전문가임에도 미국 변리사인 것처럼 미국 교재로 특허를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특허실무지식은 미국식이 아니라 한국식으로 쓴 것이다. 그래서 낯설게 느껴졌을 수 있다. 누가 됐든, 실무를 직접 안 하고 영업만 하면 수가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책을 내면서, 부족하지만 속한 업계에 보탬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많이 팔리면 개정판을 내려고 계획했는데… 출판사에 개정판을 내겠다는 말은 못 하고 있다.

최근에도 지식재산에 대한 책을 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작년에 발행한 책이 있다. "지식재산 레슨"이라는 책이다. 현재 숭실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4학년 법과대학 수업을 하고 있다. 수업하는데 마땅히 교재로 쓸 만한 게 없더라. 그래서 내가 강의 자료를 직접 만들었고, 그 자료를 모아 책을 낸 거다. 약 400쪽 분량이며 특허, 상표, 디자인, 저작권, 부정경쟁 그리고 영업비밀까지 포괄하고 있다. 대학생들에게 강의 평가도 만점을 받은 강의였다. 우리 변리사들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보탬이 되는 책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진짜 재미있다. 재미없으면 밥 사주겠다. 1독을 권한다.

이처럼 변리사로 일하시는 것과 별개로, 글을 많이 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글을 쓰게 되셨나요?
지금까지 책을 8권 썼다. 내가 작가가 되자고 마음을 먹고 계획적으로 글을 쓴 건 아니다. 고객 중 한 분이 출판사 대표와 친한데, 그분이 출판사 대표에게 나를 소개해 줬다. 얼떨결에 출판사 대표와 미팅을 하다가, 책을 내는 계약까지 하게 됐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책을 썼다. 그때 쓴 책이 "특허전쟁" 시리즈다(1편 세상을 뒤흔든 특허전쟁 승자는 누구인가, 2편 특허전쟁: 기업을 흥하게 만드는 성공적인 특허 경영 전략).

고객 중에 딴지일보라는 매체가 있다. 그 매체 편집장과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다가 글을 연재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역시 얼떨결에 연재하게 됐는데, 그때 글이 모여 "나는 아빠다"라는 육아 책이 되기도 했고, 또 "목돈사회"라는 제목의 책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오마이뉴스라는 곳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삼성과 애플 소송에 대한 해설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때 급히 쓴 기사로, 카이스트에서 주는 정문술과학저널리즘상을 받았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어, 내가 글을 잘 쓰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내 나이 마흔에 비로소 나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의 재능을 발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내 아이들, 내 후배들에게, 성과가 빨리 안 나오더라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나름 정성껏, 열심히 살았는데, 나이 마흔이 돼서야 드디어, 마침내 내 재능을 알게 된 것이다. 재능을 발견하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너무 앞서서 성급하게 자기 그릇을 정할 필요가 없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나는, 우리는, 생각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 각자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아직 모르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숨겨진 재능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되는 것이다.

"이소노미아"라는 출판사도 운영하고 계십니다. 어쩌다 출판사를 운영하게 되셨나요?
아니, 운영은 아니다. 편집장을 맡고 있다. 임앤정을 운영하면서 사무소 홍보 템플릿도 만들고, 그걸 해외에도 뿌려보기도 했다. 편집과 디자인에 친숙해진 상태였다. 그러다가, 책을 왜 서점에서 사서 읽어야만 하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만약 스타벅스에서 굿즈를 사듯 책을 살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 스타벅스는 카페인데 다이어리도 팔지 않나. 실제로 실행해보고 싶어서 책을 2권 샘플로 만들었고, 정말 스타벅스에 제안해봤다. 만나주지 않더라. 스타벅스 담당자가 책을 싫어한다는 메시지만 들었다. 그래도 만든 책이 있으니 팔아야겠다 싶어서 출판사를 시작하게 됐다. 출판사 대표는 내가 아니다.

시작한지 4-5년 정도 된 것 같다. 이소노미아라는 출판사이고,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은 변리사 일과 똑같다. 글을 써서 의뢰인을 빛내는 것, 그것이 변리사의 일이다. 저자의 생각을 저자가 쓴 글을 편집해서 그 편집으로 빛내주는 일, 편집자가 하는 일이다. 본질은 같다. 총리의 책을 편집하기도 했고, 장관의 책을 편집하기도 했고, 칸트나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인류 역사 거장들의 글을 엄선해서 번역 편집하기도 했다.

변리사 일이 메인이고, 짬을 내서 편집한다. 그러다 보니 책을 홍보할 사람이 없다. 홍보에 큰 관심도 없다. 나의 역량은 이걸로도 벅차다. 변리사에 관련된 일은 내가 다 한다. 누구에게 맡기지 않는다. 내가 고객과 상담하면 내가 써야 한다는 주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별로 없다. 그리고 책을 홍보했는데 판매가 잘 안 될 수도 있지 않나. 거기에 역량을 썼다가 망하면 출판편집을 관둘 것 같다. 관두기 싫어서 홍보를 안 한다. 홍보를 안 해서 잘 안 팔리는 거라는 변명거리를 남겨두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이신가요?
인생은 줄곧 미정 상태다. 확정된 것은 없다. 돈보다는 명예. 성공보다는 평범. 사건보다는 인생이 좋다.

내가 어떤 멋진 케이스를 한다, 돈이 많이 되는 케이스를 한다, 회사의 규모가 크다, 같은 것보다는… 내 인생의 균형을 중시하고 싶다. 외적인 성장이나 수입보다는 내가 최초에 개업했을 때 내 자유가 중요했던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계속 늙어가고 싶다. 지속적인 노화 과정을 함께 거치면서도 가족과 계속되는 유대 관계를 가지는 것. 나와 내 아내와 아이들이 여전히 마음을 열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 이런 것들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변리사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목표는 두지 않고, 하루하루 충실히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멋지든 멋지지 않든. 돈이 되든 안 되든, 흔들림 없이 실무를 한다. 나에게 현장인 내 책상 앞을 떠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한다. .

책은 앞으로 수십 권 더 쓸 것 같다. 지금 쓰고 있는 책들도 있다. 주제는 아마도 인문학/철학이 될 것 같다. 그쪽 분야의 책을 쓰거나 혹은 번역을 하거나. 나는 육체적인 레포츠보다는, 이런 정적이고 지적인 활동, 감상이 좋다. 최근에는 "논리학"에 대해서 책을 준비하고 있다. 직접 쓰는 책이다. 서양 사람들에게 논리학의 역사는 2500년에 이른다. 반면 우리는 논리학에 대한 역사가 짧다. 우리는 100년도 안 된다. 시중에는,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참고할 만한 논리 교재가 없다. 변리사가 하는 일은 논리로 타인을 설득하는 일이지 않나. 실무적으로 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돌아가서 공부하고 있다. 나의 경험과 사례를 묶어서 책으로 낼 예정이다. 아이나 직장인을 위한 논리학책도 써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인류사에 가장 빛나는 철학책 중 하나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다. 그걸 번역하고 있는데, 3년 정도의 계획으로 하는 일이다. 아마 두꺼운 1000페이지 정도 되는 번역서가 나올 거다. 읽으면 머리가 좋아지는, 인생이 달라지는 그런 인류의 고전 중의 고전이다.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번역한 책이 널리 읽히고 있지만, 그 책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우리말의 무덤이다. 그걸 바꿔보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하겠다는 게 나의 모토이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이란, 가장 평범하게 사용되는 우리말이다.

다른 변리사에게 조언을 해주실 수 있나요?
변리사의 소득은 많지는 않지만, 또 적지도 않다. 관건은 이 소득을 얼마나 지속할 것인가이다. 다들 이 지속가능성에 궁금증이 있을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지나가는 모든 변리사에게 붙들고 얘기하고 싶은 것인데,  전문가의 인생을 살지 말고, 지식인의 인생을 살라고 말하고 싶다.

변리사로서 전문가, 스폐셜리스트가 되어야지 하는 순간, 자칫 성과는 수치화되고 인생은 조직의 부품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전문가의 인생은 고달프다. 어느 순간에는 굉장히 똑똑해 보일 수 있지만, 시장과 법의 변화를 좇지 못하는 순간, 인생은 금세 퇴락한다. 퇴락한 전문가는 전문가가 아니다. 누구에게든 대체가 가능해진다. 당신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더 잘하고 더 저렴한 사람이 당신의 일을 할 것이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인생을 이어갈 것인가?

세상의 변화를 그걸 거스를 수 없다면 다른 스타일로 인생을 살면 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 지식인의 인생을 살자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재산을, 생각에 관한 것을 다루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이 분야에서 가진 전문적인 지식과, 매일 일하면서 얻는 논리적인 소양과, 그리고 인류의 지혜와 통찰이 더해지면 엄청난 깊이가 생긴다. 한쪽에서만 깊어지는 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깊어질 수 있다. 이게 지식인의 인생이다.

큰 로펌의 한 팀, 큰 인하우스의 한 팀에 머물면서 지나치게 한우물을 파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우물은 마를 수 있다. 대체 가능한 부품의 인생이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자유를 얻어가는 인생이, 내게는 아무래도 현명하게 보인다.

수가를 고민하는 변리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변리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갑을 관계의 수수료는 우리가 자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용을 청구할 때, 청구항 개수나 도면 분량 등으로 해본 적이 없다. 그건 일본식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개량하면, 비교하기 딱 좋아진다. 내 가격은 내가 정한다. 어려운 안건은 좀 더 받고, 쉬운 것은 좀 깎아주고… 

시장은 우리의 생각보다 굉장히 합리적이다. 이런 나의 대응이 비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납득된다. 그런데 인하우스에 변리사가 있으면 이걸 납득하지 못 하는 것 같다. 비교에 익숙한 사람들은 먼저 수치로 비교한다. 다른 사무소는 더 싸다면서. 기업의 지식재산 전담부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실을 모르면서 하는 얘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결국 하는 일은 비용을 통제하는 것이다. 기업 내에서 창의성을 어떻게 자극하고, 증진하고, 향상시킬 것인지 조직적으로 고민하는 그런 팀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모든 인하우스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내 넋두리라고 생각해 달라.

재밌게도, 인하우스에 변호사가 있으면 이걸 쉽게 납득하고, 일이 훨씬 쉬워지고, 더욱 전문가로 대우받으며, 오히려 비용을 올려주려고까지 한다. 이것이 우리 업계의 쓸쓸함이다. .

새로 합격할 60기 변리사에게 조언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요즘 젊은 세대를 잘 모른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그럼에도 조언을 하자면, 나는 60기 변리사들이 업계를 이끌어갈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39기다. 내가 처음 변리사가 됐을 때, 업계에서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얘기가 반복되었다. 그게 20년 전의 일이다. 이 해묵은 비관에 중독되지 말고, 낙관적인 비전을 세웠으면 좋겠다.

국가는 당신에게 지식재산 전반에 걸쳐 활약할 자격을 부여했다. 국가가 준 의도를 최대한 살려서, 자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으면 좋겠다. 그런 변리사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으로 자기 자신을 성장시켰으면 좋겠다. 큰 로펌에 들어가거나, 큰 인하우스에 들어가면 좋은 일이다. 박수를 치자. 그러나 너무 오래 근무하면 어느 순간 답답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자. 그래서 수습 자리를 구하거나, 초기 경험을 쌓을 때에는 항상 유연하고 역동적으로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래 일하면 조직에게는 좋겠지만, 옮겨 다니면서 경험을 쌓는 게 변리사 개인에게는 더 좋다. 변리사로서의 인생이라는 정체 불분명한 삶을 살기보다는, 변리사 누구 아무개의 개인 인생을 유연하고 풍부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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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유변뉴변 , 2023년 5월 5일, 
2
이름만큼 멋지신 분이네요

BLSN , 2023년 5월 5일, 
2
글에 김이 묻었어요..잘생김

ㅎㅈㅎㅇ , 2023년 5월 5일, 
2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시고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계신 것 같아서 멋지세요!!

졸려 , 2023년 5월 5일, 
2
교과서 잘 읽었습니다 새책도 읽어볼게요 지식재산레슨

특허발굴 , 2023년 5월 7일, 
2
그러고 싶지만 그러기 쉽지 않기에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행복한별 , 2023년 5월 10일, 
1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밍네 , 2023년 5월 14일, 
1
너무 멋있습니다! 귀중한 생각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변 , 2023년 8월 25일, 
1
변리사로써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라는 고민이 많은 시기였는데 .. 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또다른 정의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손 , 2023년 11월 16일, 
1
변리사 수험을 생각 한 10년 전부터 팬이었고 올해 변리사 시험에 합격해서도 여전히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한번 실제로 뵙고 싶습니다. 특허문서론 책에 싸인이라도 받고 싶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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